이 글은 과학자 아인슈타인이 1949년 5월 미국의 독립계 좌파 월간지 먼슬리리뷰 창간호에 쓴 것이며, 이 잡지는 주기적으로 이 글을 반복해서 싣고 있습니다.



왜 사회주의인가? (WHY SOCIALISM?)

알버트 아인슈타인 (by Albert Einstein)

경제나 사회 문제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사회주의에 대한 견해를 표현해도 되는 걸까? 나는 몇 가지 이유로 그렇다고 믿는다.

먼저 과학적 지식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생각해보자. 방법론상으로 천문학과 경제학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 같지 않아 보인다. 두 분야의 학자들은 모두 많은 현상들의 관계를 가능한 한 명확하게 하기 위해 현상들의 일반적인 법칙을 찾으려고 시도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방법론 차이가 분명히 있다. 경제학에서 일반 법칙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따로 떼어내서 정확하게 평가하기 어려운 많은 요인들이 경제 현상들에 종종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른바 인류의 문명사가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축적된 경험은, 잘 알려진 대로 본질적으로 경제적이지 않은 원인의 영향을 받았고 또 이것의 제약을 받아왔다. 예를 들어, 역사상 대부분의 나라들은 정복 덕분에 존재했다. 정복하는 이들은 법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점령지에서 특권층이 됐다. 그들은 땅 소유권을 독점했고 자기 계급 사람을 성직자로 임명했다. 교육을 통제한 성직자들은 계급 구별을 영원한 제도로 정착시켰고 사람들이 사회행동을 할 때 (상당 부분 무의식적으로) 따르게 되는 가치체계를 창조했다.

그러나 말하자면 역사적 전통은 과거의 이야기다. 토르스테인 베블린이 인간 발전의 "약탈 단계"라고 부른 것을 우리는 진정으로 넘어서지 못했다.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경제적 사실들은 이 단계에 속한다. 또 여기서 추출한 법칙을 다른 단계에 적용할 수도 없다. 사회주의의 진정한 목적이 인간 발전의 약탈 단계를 극복하고 전진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 단계 경제학은 미래 사회주의 사회에 빛을 제시하기 어렵다.

둘째로, 사회주의는 사회윤리적 목적을 향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과학은 목적을 창조할 수 없다. 이것을 사람에게 주입시키는 것은 더군다나 못한다. 기껏해야 과학은 이런 목적을 이루는 도구를 제시할 뿐이다. 목적을 인식하는 것은 높은 윤리적 이상을 갖춘 사람들이며, 이 목표가 사산한 것이 아니라 활력 있는 것이라면 이를 입양해서 키우는 것은 사회의 점진적인 진화를 결정하는 많은 사람들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사람 문제에 관한 한 과학과 과학적 방법을 과대평가하지 않아야 한다. 또 우리는 사회 조직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에 대해 의사 표시할 수 있는 사람이란 전문가들뿐이라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인간 사회가 위기를 겪고 있으며 안정성이 심각하게 무너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수없이 많다. 개인들이 크든 작든 자신 스스로가 소속된 집단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인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 이런 상황의 특징이다. 내가 말하는 뜻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개인적인 경험을 소개한다. 나는 최근에 지식인이며 인격자인 사람과 또 다른 전쟁이 발생할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다시 전쟁이 난다면 인류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을 것이라고 생각돼, 초국가 조직만이 이런 위험에서 우리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내 손님은 냉철하게 말했다. "인류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 왜 그렇게 반대하십니까?"

한 세기 전만 해도 이런 말을 그렇게 쉽게 하는 이들이 없었음이 분명하다. 이런 발언은 자신의 평정을 찾는 데 실패하고 성공에 대한 희망조차 잃어버린 이들이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고통스런 고독과 고립의 표현인데, 요즘 많은 사람이 이런 고통을 겪고 있다. 원인이 뭘까? 탈출구는 있는가?

이런 질문을 제기하기는 쉽지만 어느 정도라도 확실한 답을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노력해볼 작정이다. 물론 나는 우리의 감정과 시도가 종종 서로 모순되고 모호하며 그래서 쉽고 간단한 수식으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사람은 언제나 고독한 존재인 동시에 사회적 존재이다. 고독한 존재로서 사람은 자신과 자기 주변 인물들의 존재를 지키려고 하고, 개인적인 요구를 만족시키려 하며 자신의 타고난 능력을 계발하려고 한다. 사회적 존재로서는, 주변 인물들에게서 평가받고 사랑을 받으려 하며 그들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위로하며 그들의 생활여건을 개선하려고 한다. 종종 모순적인 이런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는 점만이 사람의 특징을 설명한다. 또 사람의 심리적 평정은 이 두 가지 유형의 노력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이 노력은 사회의 복지에도 기여할 수 있다. 인간에게 있어 고독한 존재라는 측면과 사회적 존재라는 측면 가운데 어느 면이 상대적으로 강하게 나타나느냐는 주로 유전에 의해 결정될 여지가 크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발현되는 인간의 개성은 대개 그가 자란 환경과 사회 구조, 그 사회의 전통, 그리고 특정 행위들에 대한 그 사회의 평가에 따라 형성된다. 개인에게 "사회"의 추상적 개념은, 자신의 동시대인 및 이전 세대 사람 전체와 맺는 직접, 간접적인 관계의 합이다. 개인은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고 노력하고 일할 수 있다. 그러나 물질적이고 지적이며 감성적인 존재로서 개인은 또한 많은 부분을 사회에 의존한다. 그래서 사회의 틀 밖에서 사람을 생각하거나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에게 음식, 옷, 집, 도구, 언어, 생각의 형태, 생각의 내용 대부분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사회"이다. 사람이 생을 유지하는 것은 "사회"라는 간단한 단어 뒤에 숨어있는 현재와 과거의 수많은 사람들이 한 일과 성과 덕분이다.

그래서 명백한 사실은, 개인이 사회에 의존하는 것이 개미나 벌이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사라질 수 없는 본성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개미와 벌의 삶 전체가 세세한 부분까지 유전적 본능에 따라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과 달리, 인간 사회의 형태와 상호관계는 아주 다양하며 변화할 수 있다. 기억, 새로운 조합을 할 수 있는 능력, 언어라는 선물이, 사람에게 생물적 요구와 무관한 발전을 가능하게 한다. 이런 발전은 전통, 조직, 문학, 과학기술적 성과, 예술작품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은 사람이 자신의 행위를 통해 자신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고 이 과정에 의식적인 생각과 요구가 개입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해준다.

사람은 유전을 통해 태어날 때 생물학적 특성을 갖춘다. 여기에는 인류를 특징짓는 자연적인 요청도 포함되는데, 우리는 이를 고정되고 바꿀 수 없는 것으로 여긴다. 게다가 사람은 사는 동안 의사소통을 비롯한 다양한 통로를 통해 사회가 제시하는 문화적 특성을 받아들이게 된다. 문화적 특성은 시간이 흐르면서 바뀔 수 있는 것인 동시에, 상당한 정도까지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결정하는 것이다. 현대 인류학의 원시문화 비교연구 덕분에 우리는 사람의 사회적 행위가 사회를 지배하는 문화적 유형, 조직 형태에 따라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게됐다. 사람의 운명을 개선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사람은 인류의 생물학적 특성 때문에 서로를 멸망시키거나 잔인한 자기 파괴적인 운명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저주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삶을 만족스럽게 하기 위해 사회구조와 문화적 태도를 어떻게 바꿔야하는가 하고 자문할 때는, 사람이 바꿀 수 없는 특정한 조건이 있다는 점을 언제나 명심해야 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생물학적 본성은 바꿀 수 없다. 게다가 지난 몇 세기동안 이룩한 기술적, 인류통계적 발전은 우리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조건들을 만들어냈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람이 많기 때문에, 노동과 고도로 중앙집중적인 생산 설비의 극단적인 분리는 전적으로 피할 수 없다. 개인이나 작은 집단이 자급자족할 수 있던 목가적인 시대는 영원히 사라졌다. 인류가 생산과 소비의 지구촌을 구성했다고 말하는 것은 약간 과장된 이야기일 뿐이다.

나는 이제 우리 시대 위기의 본질을 간략하게 지적할 수 있는 단계에 왔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개인은 자신이 사회에 의존한다는 점을 어느 때보다 더 잘 인식하게 됐다. 그러나 개인은 이 의존성을 긍정적인 자산이며 유기적 연관이며 보호해주는 힘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연적인 권리, 한 걸음 더 나아가 경제적 생존에 대한 위협으로 느낀다. 게다가, 개인적인 욕구는 갈수록 강조되는 반면 원래 이보다 약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욕구는 갈수록 황폐해지는 상황이다. 사회적 지위가 어떻든 간에 모든 사람은 이런 황폐화에 시달리고 있다. 이기주의의 포로가 된 인간은 불안해지고 외로우며, 순진하고 단순하며 세련되지 못한 삶의 쾌락을 추구하고 있다. 사람이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면 사회에 자신을 헌신하는 것밖에 길이 없다. 비록 이 의미가 짧고 위험한 것이기는 하지만.

오늘날 자본주의사회의 경제적 무정부 상태가 악의 진정한 근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 앞에는 큰 생산자 집단이 존재한다. 이들은 총체적인 노동의 과실을 강제가 아니라 법적으로 확립된 규칙에 충실해서 빼앗아내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계속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생산 수단 곧 추가적인 자본재 뿐 아니라 소비재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총체적인 생산능력은 대부분 합법적으로 개인의 소유물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단순화를 위해 앞으로 나는 생산수단을 나눠 갖지 못한 이들을 "노동자"라고 부르겠다. 이것이 일반적인 용어사용법에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생산수단을 소유한 사람은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사는 위치에 있다. 생산수단을 사용해서 노동자들은 자본가의 재산이 될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 낸다. 이 과정에서 핵심이 되는 점은 실질 가치로 따진 상품과 임금의 관계다. 노동계약이 "자유롭게" 이뤄지는 한, 노동자가 받는 것은 자신이 생산한 상품의 실질 가치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의 최소한의 필요와 자본가의 노동력 수요에 따라 결정되는데, 이는 일자리를 원하는 노동자 숫자와 관련된다. 이론적으로도 임금은 생산한 것의 가치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는 점은 꼭 이해해야 한다. (자유 경쟁시장에서는 임금도 일반적인 상품가격과 마찬가지로 수요와 공급에 따라 결정된다는 뜻: 번역자)

사적인 자본은 소수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부분적으로 자본가들의 경쟁 때문이다. 부분적으로는 갈수록 심해지는 노동의 분리와 기술개발이 적은 비용으로도 더 많은 생산단위를 만들도록 유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발전의 결과는 사적 자본의 과두정치(독재정치)다. 이는 민주적인 정치사회에서조차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없는 막강한 힘이다. 실질적인 목적 때문에 유권자를 입법부에서 분리시킨 사적 자본가들의 재정지원을 받거나 영향을 받는 정당이 의회를 구성하게 된 이래로 이는 명백한 진실이다. 이 결과는 시민의 대표가 특권 없는 다수의 이해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게다가 현재의 조건에서는 사적 자본가들이 피치 못하게 주요 정보원(언론, 라디오, 교육 등)을 직접, 간접적으로 지배한다. 그래서 시민 각자가 객관적인 결론을 얻어 자신의 정치적 권리를 현명하게 활용하기는 너무나 어렵고, 대부분의 경우 불가능하다.

자본의 사적인 소유에 기초한 경제가 지배하는 상황의 특징은 다음 두 가지다. 첫째로 생산수단(자본)을 개인이 사적으로 소유하며 소유자는 자신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처분한다. 둘째로, 노동계약은 자유롭게 이뤄진다. 물론 이런 관점에서 완전한 자본주의 사회는 없다. 특히 오랜 힘겨운 정치투쟁을 통해 노동자들이 조금은 개선된 "자유 노동계약"을 특정한 노동자 집단에 적용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로 보면, 현재 경제는 "순수한" 자본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생산은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익을 내기 위해 이뤄진다. 일할 능력이 있고 의사도 있는 사람이 모두 일자리를 얻는 장치는 없다. "실업자 군대"는 언제나 존재한다. 노동자는 상시적으로 실업을 걱정한다. 실업자나 저임 노동자는 이익을 내는 시장을 형성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소비재 생산은 제한되고 그 결과는 엄청난 곤궁이다. (물건을 살 능력이 없는 이들이 많기 때문에 그만큼 자본가는 생산을 줄이고, 이는 또 다시 가난한 이들이 물건을 사기 어렵게 만든다는 뜻: 번역자) 기술 진보는 노동의 짐을 덜어주는 것이 아니라 실업만 증가시키는 결과를 종종 낳는다. 자본가들의 경쟁과 연관된 이윤 동기야말로, 자본 축적과 활용의 불안정과 그 결과로 나타나는 심각한 경기 침체의 원흉이다. 무한 경쟁은 노동의 엄청난 낭비를 유발하며, 내가 위에서 언급한 개인들의 사회의식을 불구로 만든다.

개인을 불구로 만드는 것은 내가 보기에 자본주의의 최대 악이다. 이 악 때문에 우리의 교육체계 전반이 고통을 겪고 있다. 과장된 경쟁을 벌이는 태도가 학생들에게 주입됐고, 그래서 학생들은 미래 직업을 위한 성공을 숭배하게 됐다.

이런 악을 제거하는 길은 오직 하나 뿐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것은 사회적 목표를 추구하는 교육체계를 동반한 이른바 사회주의 경제를 확립하는 것이다. 이런 경제에서는 생산수단을 사회 전체가 소유하며 계획된 방식으로 이를 활용한다. 생산을 사회의 필요에 맞추는 계획경제는 일감을 일할 능력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분배할 것이고 모든 사람(남자든 여자든 어린아이든)에게 생활을 보장할 것이다. 개인의 교육은, 현재 우리 사회의 힘과 성공을 칭송하는 대신에 자신의 타고난 능력을 신장하고 동료들에 대한 책임감을 자신 속에 심으려 시도하는 형태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계획 경제가 아직은 사회주의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식의 계획경제는 개인을 완전히 노예화함으로써도 달성할 수 있다. 사회주의를 달성하려면 아주 극도로 어려운 사회-정치적 문제를 풀어야 한다. 그 문제란, 정치, 경제적 힘의 광범한 중앙집중화를 고려할 때, 관료들이 모든 힘을 장악하고 자만해지는 것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또 개인의 권리를 어떻게 보호하고 이를 바탕으로 관료의 권력에 맞서는 민주적인 평형추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사회주의의 목표와 문제를 분명히 하는 것은 지금 이행의 시기에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런 문제에 대한 자유롭고 허심탄회한 토론이 강력한 금기사항 아래 억압되고 있는 것이 현재 상황이기 때문에, 이 잡지(먼슬리리뷰 = 옮긴이)의 창간은 공공에 대한 중요한 서비스라고 나는 생각한다.


번역한 지 2년도 더된 2001년 2월말에 번역하지 않은 몇 부분을 추가했습니다.
제가 번역 대상으로 삼았던 글은 어찌된 일일지 마지막 두 단락이 없는 것이었고, 이를 뒤늦게 알고도 2년 이상 그대로 두다가 새로 추가했습니다. 또 제가 번역하다가 실수로 빼먹은 한 단락을 동료 한명이 지적해주셔서 그 또한 추가했습니다.
정확한 것은 한영 대역본을 보십시오.
원문은 먼슬리리뷰 (www.monthlyreview.org/598einst.htm) 에 있습니다.

번역: 신기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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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지도]
카테고리 - 인문/교양
지은이    - 리처드 니스벳 저/최인철 역(김영사, 2004)



누구나 막연하게 알고있고 인지하고 있는 서양인과 동양인의 사고방식의 차이에 대하여

대신 잘~ 정리해주고있는 책.


그냥 그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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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최대의 쇼]
카테고리 - 생명과학
지은이    - 리처드 도킨스 저/김명남 역(김영사, 2009)



얼마전 다큐멘터리 갈라파고스를 보았다.
(갈라파고스 섬은 영국의 신학자이자 생물학자인 다윈의 진화론 연구의 무대가 되었던 곳이다.)
 
또 어제는 갈라파고스 섬을 중심으로 한 해양 생태계를 다룬 Oceans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았고,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태계의 경이로움에 탄복하던 중 얼마 전 읽었던 책이 다시 떠올랐다.


지상 최대의 쇼.


이 책은 지구상의 모든 동식물과 생태 환경이 진화에 의해 변화해왔다는 사실과 그 아름다운 변화의
증거들을 보여주고 독자들에게 진화론의 진실성을 논증한다.


모든 신앙인들이(날라리 신자인 나 조차도) 이야기하기 불편해하는 진화와 진화론이라는 주제에 대해,
이 책이 이야기하는 진화에 대한 논증과 증거들은 경이롭고 아름답기 그지 없어서,
오히려 이러한 경이로움이야말로 신이 아니고서야 누가 주관할 수 있겠는가 하는 역설적인 생각마저
들게 만드는 것이다.

진화가 사실임을 의심할 여지는 없는 것 같다.
(과학계에서는 지난 150년간의 검증 과정을 거쳐 자연선택 이론에 더이상 '가설'이 아닌 '원리'의 지위를 부여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자연선택설이 아닌 자연선택의 원리가 맞다.)

만약 진화론에 대한 종교적 논쟁의 꺼리가 아직도 남아있다면,
진화론이 사실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진화가 신에 의한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일 것이고,
종교와 과학의 진지한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가 360년 후 복권되었듯 다윈에게도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아마 이 책이 기여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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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교시절의 기억 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친구가 하나 있다.

체구가 작았지만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항상 당당했던 그 아이는
야구를 좋아하고 음악을 무척이나 좋아하던 친구였다.


우리는 노래 부르는 것이 그저 좋아서 노래방을 자주 같이 다녔고,
가끔은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를 만들어 부르곤 했다.


유재하와 김동률을 좋아했던 그아이의 꿈은 작곡가가 되는 것이었고,
나는 겉으로 표현 한 적은 없었지만, 그 꿈이 이루어질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피식 웃음이 나는 일이긴 하지만
그 아이가 만든 노래를 가지고 강변가요제에 출전한 일도 있었다.


단짝처럼 지냈고 꽤 친했던 친구였지만 고교 졸업과 동시에 별로 만날
기회가 없어지게 되자 나의 기억 속에서도 점점 사라져간 그런 친구였다.


가끔..

그녀석은 뭐하면서 살고 있을까? 하고 생각나는 정도의...

 

일반에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더 필름(The Film)이라는 뮤지션이 있다.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KBS 가요제에서 입상한 경력이 있고,
TV활동보다는 음악활동에 전념하는 나름 진지한 뮤지션이라고 한다.


나는 몇 년 전에 '괜찮아'라는 노래로 더 필름을 알게 되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괜찮아~" 하고 노래하지만 가슴 한 켠이 저려오는 이노래가 참 좋아서
한참 동안 MP3플레이어에 두고 들었던 기억이 난다.

왜.
이 노래를 누가 만들고 불렀는지 찾아보지 않았을까?

오늘 이 친구가 연락을 남기고 갔다.

그는 십 오년 전 자기가 되고 싶어했던 바로 그 모습이 되어있었다. 놀랍게도.

덕분에 아주 오랬동안 잊고 살았던 친구 하나와
멋진 뮤지션을 만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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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kyeun 2010/06/01 13: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 보니 우리가 학교 다닐 때 당신이 "가요제"나간다고 "별 어쩌고..." 노래를 녹음해서 들려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 친구 맞나??
    당신 친구를 찾으니 내 친구를 찾은 것 같고,
    꿈을 이루고 있는 당신 친구를 보내, 내 꿈도 이룬 것 같네...

    축하해~~~~

  2. BlogIcon 서현맘 2010/06/01 21: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머, The Film이 차과장님 친구가 만든 음반? ㅎㅎ 나 이거 예전에 회사관둘 때 한국에서 산 마지막 CD인데.. "괜찮아~" 이 노래 정말 무한반복으로 케이프타운에서 들었던 기억이 새롭네..ㅎㅎ 멋진 친구와 연락이 닿게 된거 축하~ ;-)

[허삼관 매혈기]
카테고리 - 소설
지은이    - 위화(푸른숲, 2007)


허삼관의 인생 역정은 가난하고 힘들고 고되지만,
중국 작가 위화의 유머러스한 글쓰기는 이야기를 읽어가는 내내 입가에 웃음을 떠나지 않게 만든다.


딱히 남의 등을 처먹을 정도로 못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남들보다 특별히 양심적일 것도 없으며,
'남들 앞에서는 다소 비굴해 보이지만 자식과 마누라 앞에서는 자신만만해 집에서 늘 잔소리가 많은,'


하지만 누구보다 가족을 사랑하고 헌신할 준비가 되어있는 세상 모든 아버지들의 인생도 그 누구의 삶 못지 않게 녹녹치 않고 힘들겠지만,

허삼관의 인생 처럼 행복하게 끝나길.


(탁자를 손으로 두드리며 시원스러운 목소리로) "여기 돼지 간볶음 한 접시하고 황주 두냥
가져오라구! 황주는 따뜻하게 데워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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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분들이 축하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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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상, 중, 하)  (1) 2009/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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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kyeun 2010/04/02 18: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차과장 축하해용~~~!!!!
    가늘고 길게 길게 명서 등록금 탈 때까지 다녀 주세요...^^

어제는 급체로 하루종일 괴롭고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병이난걸 보니 겨울이 끝나려나보다.

만원버스에 시달리면서 집에 갈 엄두가 나지 않아 택시를 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눈 질끈 감고 9000번 버스에 몸을 싣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고 싶은 생각 뿐이다.

한참 고속도로를 지나고 있는데 명서에게 전화가 왔다.

"아빠 언제 들어와? 늦게와?"
"응 버스타고 가고 있으니까 한 30분쯤 후에 도착 할거야"
"올레~"

아.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정말이지 명서, 명효와 놀아줄 에너지가 없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작전대로 이불을 덮고 누웠다.
사실.. 그거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경은이 실과 바늘을 들고 와서는 손발을 따주겠단다.
손가락 네개와 발가락 두개를 따고나니 한결 나아지는 것 같다.

전복죽까지 끓여다 주기에 죽으로 간단히 속을 다스리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명서, 명효는 아빠와 많이 놀고 싶었겠지만,
고맙게도 아빠를 놓아주었다.

남은 전복죽을 명서와 명효가 싹싹 핥아먹는다.
아빠가 먹는걸 보니 맛있어보였나보다.

경은이 아이들에게 책 읽어주는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든다.

아프지만,
편안하고 행복하다.

내일은 꼭 나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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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kyeun 2010/04/02 18: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사....감사...
    그 동안 내 히스테리를 받아준 것 감사감사..
    이해해 준 감사...감사...
    집에 있는 내게 기대치가 있엇을 텐데 나에게 더 많이 바라지 않았던 것 감사감사...
    모든것을 감사하고 사랑해용~~~


[교수대 위의 까치]
카테고리 - 예술/대중문화
지은이    - 진중권(휴머니스트, 2009)


먼저 그림을 보여준다. 
그림 속에 담겨있는 수수께끼 또는 의문점을 제시하여 읽는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리고 미술사, 철학, 인문학을 아우르는 폭넓은 지식과 진중권씨 특유의 말(글)빨로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며 수수께끼의 해답에 접근해간다.
하지만 결론을 내는 것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놓는다.

작가(진중권)는 본인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했던 12점의 작품에 대해서 위와 같은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12편의 (짧막한)다빈치 코드를 보는 듯 하다.

서양미술에 대한 지식 수준이 대학교 1학년 교양과목 수준에 머물러있는 나로써는 세상에 공부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한다. 책은 읽는 내내 흥미롭다.

하긴 [교수대 위의 까치] 외에도 이와 같이 명화들을 대신 '읽어주는' 종류의 책들은 언제나 재밌다.
작품의 배경이나 숨겨진 알레고리, 만들어진 시대의 이야기나, 비하인드 스토리 등 미처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에 대한 설명을 듣다보면, 때로는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기도 하고 무릎을 탁! 치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그야말로 '지적 유희'로, 그것은 그것대로 재미있는 것이다.
누군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김태희의 얼굴보다 사생활이 더 궁금'한것 처럼...
(아는 만큼 보인다고는 하지만..)

아무튼 조금 뜬금없는 이야기를 적어보자면, 나는 르누아르의 작품을 좋아한다.
그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너무나 화사하고, 예쁘고, 행복하고, 편안하고, 애정이 넘친다.
궂이 작품속에서 알레고리를 찾아내기 위해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그려지다 만 것 같은 희미한 발목을 보면서 '이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하고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인가보다.

(직접 보게 되었을 때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바느질하는 마리 테레즈 뒤랑-뒤엘' 
캔버스에 유채 81×66cm 1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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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상, 중, 하)]
카테고리 - 소설
지은이    - 아고타 크리스토프(까치글방, 1993년)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세가지 거짓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첫번째 이야기는 두번째 이야기에 의해 거짓임이 증명되고 있고,
두번째 이야기는 세번째 이야기에 의해 거짓임이 증명되고 있으며,
모든 소설은 허구이므로 필연적으로 세번째 이야기 또한 거짓인 것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충격과 혼란스러움을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은 이 세가지 거짓 이야기들이 모두
한가지 사실(Lucas와 Claus의 인생 혹은 작가 자신의 인생)에 대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있기
때문이며, 각 이야기들이 독립적인 소설로 발표되었다고는 하나 따로 떼어놓고 생각 할 수 없는 것
역시 이때문이다. 

이러한 독특한 구성이 주는 매력 외에도 다양한 등장인물, 2차대전 당시의 혼란스런 정치/사회 상황, 대담하면서도 간결한 문체 등 읽을 거리가 풍부하고 흡인력 있는 소설이다.

무엇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묘한 여운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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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kyeun 2009/12/23 17: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가 죽을 거라는 건 알겠는데, 페테르, 이해는 못하겠어. 내 누나의 시체 하나만으로는 부족해서 거기에 내 것까지 보태야 하는 건가? 하지만 누가 그 두번째 시체를 원하는 거야? 신, 그는 분명히 아닐 거고. 그는 우리의 육신을 필요로 하지 않아. 그러면 사회가 원하나? 사회는 나를 살려두면 아무에게도 소용없는 시체 한 구 대신에 한 권이나 또는 여러권의 책을 얻게 될텐데."

    우리가 미쳐 파악하지 못하는 사회에 대한 통찰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나는 2차 대전을 잘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그리 많이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아직 하나의 거짓말 밖에 파악하지 못한 경은..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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